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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런 함양 개평마을 테마트레킹 잘 보존된 한옥! 어릴적 울 고향집 같이 정겨워라~ (경남 함양)

구염둥이 2015. 5. 8. 15:42

함양 개평한옥마을 이야기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전·후 툇집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3∼4단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방주이며 약한 민흘림을 두었다.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며 우측 방 전면의 툇마루는 약간의 높이차를 두었다.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해 사랑채가 1838년, 안채는 1840년 등 건립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부재의 단면크기가 크지는 않으나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한 가구기법이나,

안채, 사랑채에 모두 전 ·후 툇간을 적용한 점 등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또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계층의 주거형태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옮긴글)

 

 

 

 

두성씨가 살았다는 이야기

 

 

 

 

앞으로도 잘 보존되서 우리 후손들도 함께하면 좋겠어요

 

 

 

 

 

하동정씨 고가는 1880년에 지어진 것으로 경남문화재자료 제361호에 이름을 올렸다.

건립 당시에는 사대부가답게 사랑채를 비롯해 그 규모가 컸으나 현재는 작은 사랑채와 안채,

대문간채만 남아 있다.

오담고택은 조선 말엽 문장가였던 오담 정환필 선생의 집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돼 있다.

 사랑채는 1838년 안채는 1840년에 지어졌다.

조선 후기 양반가의 건축양식과

가구기법을 연구하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붕 낮은 옛집들과 거기에 담긴 추억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그런데 시간의 거센 겁박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오롯이 각인된 기억들을 지켜낸 곳이 있다.

시간이 멈춰 버린 바로 이곳 지곡면 도숭산 자락에 자리한 개평마을이다.
 선비의 고장 함양.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면 따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정신문화의 수도`로 불리는 안동에 견줄 만큼 함양에는 유서 깊은 향교와 정자,

누각 등이 곳곳에 널려 있다.

 
100가구 191명이 어울려 사는 지곡면 개평마을은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탄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가옥의 대부분이 한옥인 이 마을은 시간의 흐름에서 비껴선 것처럼 보인다.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60여 채의 기와집들과 마을의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골목길이 마치

민속촌에라도 찾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옮겨온글들)

 

 

 

 

 

 

예쁘게핀 명자꽃도 명자를 부르는듯 !

담장넘어 이야기

 

 

오담고택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전·후 툇집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3∼4단 쌓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방주이며 약한 민흘림을 두었다.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며 우측 방 전면의 툇마루는 약간의 높이차를 두었다.

 

종도리에 기록된 상량문에 의해 사랑채가 1838년, 안채는 1840년 등 건립연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부재의 단면크기가 크지는 않으나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한 가구기법이나,

안채, 사랑채에 모두 전 ·후 툇간을 적용한 점 등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또한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계층의 주거형태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옮겨온글)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고,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개평마을은 14세기에 하동 정씨와 경주김씨가 들어와 살다가

 15세기에 풍천노씨가 합류해 마을을 이뤘다.

현재는 김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정씨와 노씨 일색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몇 집들이 있는데 짧게는 100여 년 전,

길게는 500년 쯤 전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중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집은 누가 뭐래도 일두 정여창 고택이다.


 정여창(1450∼1504) 선생은 조선조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대가이다.

 전국 234개 향교와 9개 서원에서 받들어 모실 정도로 그는 조선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여창고택은 국가지정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대하드라마 `토지`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이 집은 정여창 선생 타계 1세기 후,

생가 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우람한 솟을대문이 집의 크기를 말해준다.

안채,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된 이 집은 곡간만도 10칸이나 된다.


 정여창 선생의 후손들은 대대로 과객의 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흥선대원군과 추사 김정희도 한동안 머물렀다고 전한다.

여러 개의 중문을 뒀는데,

집 오른편에 자리한 일두홍보관으로 드나드는 곳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라서 눈에 띈다.

 

정여창 선생의 기를 받아서일까.

 개평마을은 예부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겨우 100가구 남짓한 이 마을에서 대학교수만 150명이 배출됐다고 하면 믿을지 모르겠다
순서없이 글만 옮겼습니다

 

 

 

어릴적 울 고향같은 이야기

텃밭엔 이제 싹이 나온 무우와 감자

 

 

옛날 기와와 돌 흙담이 그대로 보존되여있는 개평마을 넘 멋진 이야기

 

 

 

전망 좋은곳으로 가는 이야기

 

 

개명마을앞에 흐르는 냇가 이야기

 

 

우물터라는 이야

 

 

찻집인것 같았어요

 

흙담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넘 멋진 아름다운 이야기

 

 

언덕서 내려다보는 조망 일품
 돌담길을 따라 고택을 둘러보다보면 일두 선생 산책로를 만나게 된다.

평소 정여창 선생이 산책을 즐기던 코스를 재현한 것이다.

 이 산책로는 참 운치가 넘치는 길이다. 언덕바지의 소나무군락을 지나 대숲을 스치고,

논두렁도 걷는다.

 

소나무군락은 풍수지리사상에 의거해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것이다.

 수령 300∼400년 생으로 10∼15m 높이의 적송들이다.

 현재 개평리에는 이러한 소나무들이 100주 정도 남아 있다.

소나무 중에는 특별한 것들도 있다.

시도기념물 제211호로 지정된 소나무다.

 

 약 500년 수령의 성황나무 역할을 하는 당송이다.

광복 이후까지도 주민들이 이 나무에서 당제를 지내며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한편, 소나무군락지가 자리한 언덕에는 전망데크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선 개평마을이 한눈에 다 보인다.
 이 정겹고 편안한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누구나 얼굴에 미소를 짓게된다

 

 

정여창 선생의 16대 손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옥에서 숙박을 하며 식사도 해결 할 수 있다  
최경인 기자 (겨온글들)

 

 

 

전망 좋은곳에서 바라본 개평한옥마을

 

 

개평한옥마을 이야기

개평마을이 여느 옛 마을과 다른 점은 이들 고택들을 둘러보는 데 별다른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은 대문을 걸어놓게 마련인데,

 개평마을에서는 그런 곳이 많지 않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문을 활짝 열어둔다.

 누구라도 와서 구경하고 가라는 배려다.

 

 마당 한편을 서성이고 있으면 "누구신데 그러느냐"고 한소리 할 법도 하건만,

으레 구경 온 사람이거니 하며 주인행세를 하지 않는다.

 외려 "마음껏 둘러보다 가시라"며 한쪽으로 피해주는가 하면,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며 권하는 개평마을 사람들이다.

 

 

 

 

 

 

사진찍기 좋은곳 이래요

전망대

 

 

 

 

 

 

 

함양 개평마을 한옥 이야기는 계속 이여진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