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정약용 유배지에 남아있는 초가집과 생활했던 당시모습을 보자(전남 강진군)
정약용 이야기
정약용^^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년(헌조 2년)에 죽었다.
정약용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로 지금의 행정 명으로 하자면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이다.
그의 집안은 당시 세력을 잃고 있던 남인 계열이었으므로
그의 고조부로부터 조부까지는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8대에 걸쳐 줄곧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해온 명문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해는 사도세자가 폐세자되고 뒤주에 갇혀죽은 해였다.
이후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남인)와 반대하는 벽파(노론)로 나뉜다.
시파와 벽파의 싸움은 그 후 조선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고 정약용 자신의 생애에도
깊은 그림자를 던졌다
우리는 해설사님의 시원스런 해설을 듣는다
사의재의 뜻은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
맑은 정신 (생각은 마땅히 맑게)
엄숙한 용모 (용모는 마땅히 엄숫 하게)
과묵한 말씨 (말은 마땅히 과묵 하게)
신중한 행동 (행동은 마땅히 중후 하게) [펌글]
새겨두면 좋을듯요!!
이곳에선 한옥체험도 할수 있어서 좋을것 같다
우린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보니 학교에서 하룻밤 숙식을 했다
시설도 잘 되여있구 따뜻한 바닥이 넘 좋았구 깨끗한 시설에 박수도 보낸다
해설사님의 이야길 듣고 있는 우리여성트레킹......
다산(茶山)의 삶 ^^
정약용의 삶은 크게 3개의시기로 구분을 할 수가 있다.
제1기는 벼슬살이를 하던 시기이고 제 2기는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이고 제 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 참의, 좌우승부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는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박해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박해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 계의 시파를 제거하는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 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제2기는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에서 위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유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 공세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 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은 유배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 소풍길에 혜장선사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 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 이학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 1표2서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중에서 1표 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
첫째, 『경세유표』 48권이 있으나 미완 본이다.
관제, 군현제도, 전제, 부역, 공시, 창저(倉儲), 군제, 과제, 해세(海稅), 마정(馬政), 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
봉공, 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 호, 예, 병, 형, 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서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 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서 6경 4서로써 수기하고
1표 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다산의 철학 ^^
정약용이 밝히고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의 전반이었던 만큼
그의 연구와 저술은 철학, 정치, 경제, 법률, 농학, 문학, 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두루 미쳤다.
다산 사후 100주기를 맞던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저서 500여권을 묶은
『여유전당서』76책이 간행되었다.
그 속에 실린 2,500여수의 한시는 그가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조금씩 더 알게 되면 될수록 참으로
넓고 높은 ‘다산(茶山)’이다 [다음팁글들]
강진에 가면 꼭 둘러볼곳이 많다
먹거리도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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