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성 조문국 박물관 역사는 어렵지만 천천히 둘러보기 (경북 의성군)
군립 박물관 이야기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에 있는 군립 박물관
일정대로 걷고 보고..
[소문국]조문국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2년 (185)조에는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공벌(攻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문소군(聞韶郡)은 본래 소문국(召文國)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의성부(義城府)이니 소속 현은 네 곳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도 의성에는
소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에는 소문국의 옛 터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 하고 있다.
실제 의성 지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는데, 금성산 고분군이라고 일컬어지는 금성면 대리리, 탑리리, 학미리 일대
고분은 군집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신라 마립간시기 왕족의 무덤인 적석목관분과
매우 흡사한 구조여서 주목된다.
탑리리에는 직경 20m가 넘는 봉분이 16기나 되며 가장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른다.
곧 고고 자료 분포 양상을 참고할 때도 소문국 중심지가 금성면 일대였다는
문헌 기록과 일치한다.
이에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리 고분을 발굴 조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공작새 날개 모양 3개의 입식(立飾)을 가진 금동관을 비롯한 금동 위세품 등이
출토되어 주목받았다.
이후 경희대학교와 경북대학교 등이 금성산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를 연차적으로 실시한 결과,
여러 고분에서 다수의 금동관과 금동위세품, 환두대도, 장신구 등이 대량 출토되었다.
이에 1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에서 의성 금성산 고분군을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28호로 지정하였고,
2013년 의성 조문국 박물관과 고분전시관을 개관해 발굴 유물과 기증 유물 등을
중심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물관에서 흔적도 남긴다
박물관 입구에 있는 5층석탑
풍수 설화 이야기
이 고장에는 풍수설화·지명유래설화·효자효녀설화·보은설화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금성면 탑리리에 있는 금성산에는 옛날부터 금성산의 묘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금성산 산꼭대기에 묘를 쓰게 되면 석달 동안 이 일대에 가뭄이 들고, 묘를 쓴 사람은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고종 때 이 고장만 계속 가물었다.
농민들이 안타깝게 비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금성산 산꼭대기를 샅샅이 뒤지니 석곽이 나왔다.
주민들의 울분이 일시에 폭발되어 시신의 머리가 산 아래로 팽개쳐졌다.
그러자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단비가 함빡 내렸다고 하며,
무덤을 쓴 사람은 그 뒤 다른 지역에 가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뭄이 심하게 들면 주민들이 이 산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산을 파헤치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이곳에 조상의 묘를 쓰면 큰 부자가 된다는 풍수지리설을 믿고 밤중에 남의 눈을 피해 시신을
암매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효자·효녀설화로 의성읍 치선리에 있는 ‘베틀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 갑숙이라는 처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갑자기 병이 난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해 오다 길에서 신음하는 할머니를 업고 집으로 왔다.
업고 온 할머니를 어머니와 함께 간호했는데, 다음날 할머니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병환은 말끔히 나았다.
그 뒤 갑숙이는 베를 짜서 생계를 꾸렸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 나라 안에 소문이 퍼져 임금님이 직녀들을 데리고
베짜는 시합을 구경하러 왔다. 갑숙이의 낡은 베틀을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을 때 누더기를 입은
할머니가 나타나 지팡이를 휘두르니 선녀들이 내려와 갑숙이와 같이 베를 짰다.
물론, 이 베는 직녀들의 베보다 훌륭하게 짜였고 갑숙이는 임금님에게서 상을 받았다.
이때 선녀들이 베를 짠 베틀은 열 개의 베틀바위로 우뚝 서 있게 되었고,
효녀 갑숙이는 그 뒤 왕비가 되었다고 전한다.
열떼재에 있는 낡은 집 한 채는 은혜를 베푼 사람, 은혜를 갚은 사람의 혜담·보은담이 서린 곳이다.
열떼재는 산적이 출몰해 열 사람 이상이 떼를 지어 넘어야 안전하다는 고개이다.
보리고개 때 할아버지와 손자가 소 판 돈을 안고 급히 재를 넘다가 아우성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굶주림에 정신착란을 일으킨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잡아먹으려 하고
그 어머니가 이를 말리는 소리였다.
손자는 돈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중하다고 할아버지를 설득해 젊은 부부에게 돈을 주게 하였다.
그 뒤 손자는 청년이 되었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었고,
은혜를 입은 노씨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어 옛날 은인을 찾을 방도를 모색하다가 열떼재에
주막을 차리고 행인의 과거지사를 듣기로 하였다.
행인들에게 무료로 술을 대접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주막을 그냥 지나치는 나그네를 일부러 붙잡고
옛날 일을 한자리 부탁하였다.
그는 바로 어린 손자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조씨였고, 옛날 열떼재를 넘을 때의 사건을 말하였다.
노씨네는 조씨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고 죽은 할아버지의 묘에 제사드리고, 그 뒤 양가는
두터운 정을 맺고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