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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상구 운수사의 초파일 넘 놀라운 불교인파 이야기 (부산 사상구)

구염둥이 2015. 5. 27. 06:24

운수사 초파일 이야기

 

연휴라지만 계획이 없어서 뒷산을 올라가본다

ㅎㅎㅎ 사월초파일이다

많은 사람들사찰을 찾는날

믿음이 없는 내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본다

늘상 가는 코스~

와~차가 만차 주차는 못하고 도로까지 점령 난리가 아니다

절마당엔 점심을 먹을려고 하는 사람들로 분벼서 줄지여 있구 

내는 절 마당엔 엄두도 못내고 산길을 따라

돌아보고 내려온 이야기

놀랍고 놀라워라~~

 

 운수사

 

운수사는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 산5번지 백양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가락국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된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현재 운수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72년(임자년)에 세워진 운수사 사적비가 있다.
이 비는 당시 주지였던 동천(洞天)스님의 청에 의해

운허(耘虛)스님께서 내용을 작성하시고, 무불(無佛)스님이 글씨를 쓰셨다.
너무나 유명한 운허스님(1892~1980)은 이 시대 최고의

학자승(學者僧)이자 대종사(大宗師)였었다.

스 님은 팔만대장경 전부를 한글로 옮기는 역경사업을 맡아

 그 사업을 완수하셨다.

 

동국역경원원장직을 맡아 한글대장경을 완간해 내셨다.

스님은 학문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량과 인품까지도 훌륭하신 분이셨다.
이러한 분께서 비문에서 밝히기로, “운수사는 가락국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아마 <신라 중대 법흥왕 때 쯤 창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운수사는 안타깝게도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람 전체가 불타고,

1660년에 현재의 대웅전이 다시 중수되었다.


그리고 조선 영조 때 출간된 여지도서(輿 地圖書)와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부산지역에 “범어사, 운수사, 선암사, 마하사”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운수사가 조선시대 때 이미 역사 깊은 중요한 사찰로 분류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1735년 중건된 김천 직지사 대웅전 중창 상 량문에는

 운수사 대중이 직지사 대웅전중창 불사에 참여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 직지사 대웅전은)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 개와공, 도감, 그리고 화사, 총찰도감,

 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그리고 조선시대의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는 옛날 운수사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펴졌던 것을 운수모종(雲水暮鐘)이라 하여,

 사상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날 운수사 야야기

 

 

 

 

 

 

 

 

 

높은곳 까지 올라와 주차한 차들 ~~

 

 

 

 

 

 

운수사 절로가는 사람들 시원한 그늘이 좋다고 하는 이야기

 

 

차를 놓고 걸어가는 이야기

 

 

 

 

이곳으로 가면 굴 속에 암자가 있다고 하는데 사진은 못 찍는다고 하기에 들어가지 않고

발길 돌린 이야기

 

 

넘 더워서인지 아이들이 물속에서 놀고잇는 이야기

운수천 계곡

 

 

 계곡의 아이들 물놀이가 벌써 시작인 이야기

 

 

 굴법당은 꼭 가서 함 볼생각이라는 이야기

 

이렇게 사월 초파일 운수사가 넘 분비는 이야기를

걷고 보고 올려본 내 이야기 였어요

 

펌 사진

 

운수사는 부산시 사상구 모라동 산5번지 백양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가락국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된 것은 아직 없다.

하지만 현재 운수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72년(임자년)에 세워진 운수사 사적비가 있다.
이 비는 당시 주지였던 동천(洞天)스님의 청에 의해 운허(耘虛)스님께서 내용을 작성하시고,

무불(無佛)스님이 글씨를 쓰셨다.
너무나 유명한 운허스님(1892~1980)은 이 시대 최고의 학자승(學者僧)이자 대종사(大宗師)였었다.

스 님은 팔만대장경 전부를 한글로 옮기는 역경사업을 맡아 그 사업을 완수하셨다.

 

동국역경원원장직을 맡아 한글대장경을 완간해 내셨다.

스님은 학문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량과 인품까지도 훌륭하신 분이셨다.
이러한 분께서 비문에서 밝히기로, “운수사는 가락국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근거가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아마 <신라 중대 법흥왕 때 쯤 창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운수사는 안타깝게도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람 전체가 불타고,

 1660년에 현재의 대웅전이 다시 중수되었다.
그리고 조선 영조 때 출간된 여지도서(輿 地圖書)와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부산지역에 “범어사, 운수사, 선암사, 마하사”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운수사가 조선시대 때 이미 역사 깊은 중요한 사찰로 분류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1735년 중건된 김천 직지사 대웅전 중창 상 량문에는

 운수사 대중이 직지사 대웅전중창 불사에 참여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현 직지사 대웅전은) 영조 11년(1735) 중건되었으며 당시 중건에는 주지 수변화상,

 전 주지 설운종익 그리고 태감화상을 비롯하여 산중 대중의 협력과 시주로써 이룩되었다.

 

 그 관계자는 상대목 동래 운수사의 치백과 도목수 설인을 비롯하여

 목수 20여 명과 야장, 개와공, 도감, 그리고 화사, 총찰도감, 도와도감등 50여 명의 산중대중과

 900여 명의 시주가 참가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그리고 조선시대의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는 옛날 운수사의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펴졌던 것을 운수모종(雲水暮鐘)이라 하여,

 사상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옮겨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