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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구포역에 만세길이 있는줄 이제 알았어요!! (부산시 북구)

구염둥이 2016. 5. 3. 12:32

구포역 만세거리

 

 

구포 만세거리

구포(龜浦)는 낙동강 하안(洛東江 河岸)에 위치하여

경상도 각 지역 수륙운송의 중계지로서 예로부터 상업이 번창하였다.

이 같은 상업중심지 구포에도 1919년 3.1운동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동래읍의 감격·흥분적인 민족의거의 소식이 전해져

 구포지역 애국학생과 민중들의 가슴을 비장하게 하였다.

 

1919년 3월 27~28일, 주동 인물인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김윤길·허정·김용이·최종호·유진영·윤대근 등은

 구포면 구포리 박영초·이수련 집에 모여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음력 2월 28일) 구포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결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교대로 밤을 세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매 만들고,

큰 태극기 하나와「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월 29일, 예정된 장날은 닦아왔고 긴장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주동 인물들은 미리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박덕홍·손진태·김장학·이몽석·양대용·김영길·정치호·정용학·안화중·허희중 등

 청년동지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었다.

 

그 날 정오,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장꾼 1,000여명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크게 외쳤다.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과 비장·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이때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인물이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군중들의 분노·의분은 참을 길이 없었다.

격분한 군중들은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면서,

어떤 청년들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금된 애국청년들을 구출하려고 했다.

이 항쟁에서 일군·경 3명(경찰 1명, 헌병 2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애국 군중들 중 9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구포시장의 의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주동인물은 다음과 같이 42명에 달하였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고,

또 사회적 신분으로는 농민·상인·노동자들이었다.

 

부산·동래읍에서 일어난 의거의 주동은 주로 학생 신분이었고

또 그들의 대부분이 시위운동으로 그친데 비하여,

구포시장의 의거는 저항의 위력을 발휘한

그 주동이 농민·상인·근로자였다는 것이 민족의 항일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선열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부산광역시 '북구청지명위원회'에서는

 1995년 9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구포역 앞(구포제1파출소)~구포시장통~대리천 복개도로까지

 전장 800m, 폭 8m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하였다.


구포만세 거리의 조성으로 당시 활화산 럼 타오르던 민족항일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구포 3.1의거의 참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낙동강을 걷고보고

구포시장으로 구포국수가 유명하다 해 먹으러 가면서 만난 길

 

 

 

구포시장은 오일장이지만 아주 큰 시장이다

장날은 3일~ 8일이다는 이야기

없는건 없이 다 있다

김해 농촌이 가까워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풍성하다

 

 

부산광역시 북구청에서는

구포장터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 4월 '구포장터 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기념비는 인당 이호철씨가 서체를 쓰고,

기념비는 관음석재예술원에서 제작하여 북구 구포동의 구포교 입구 낙동강 제방에

가로 315㎝, 세로 345㎝, 높이 545㎝의 거북좌대 위에

 자연석 기념비를 세웠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유관기관장 및 유공자 유족, 일반시민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기념비에는 당시 유공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비문은 생략).(부산광역시글)

 

 

 

 

 

 

 

 

 

 

구포 만세거리

구포(龜浦)는 낙동강 하안(洛東江 河岸)에 위치하여 경상도 각 지역

수륙운송의 중계지로서 예로부터 상업이 번창하였다.

이 같은 상업중심지 구포에도 1919년 3.1운동 소식과 아울러 인근 부산·동래읍의 감격·흥분적인

민족의거의 소식이 전해져 구포지역 애국학생과 민중들의 가슴을 비장하게 하였다.

 

1919년 3월 27~28일, 주동 인물인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김윤길·허정·

김용이·최종호·유진영·윤대근 등은 구포면 구포리 박영초·이수련 집에 모여

모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음력 2월 28일) 구포장날을 이용하여

거사를 결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교대로 밤을 세워가면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각각 수백매 만들고,

큰 태극기 하나와「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예정된 장날은 닦아왔고 긴장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주동 인물들은 미리 준비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박덕홍·손진태·김장학·이몽석·양대용·김영길·

정치호·정용학·안화중·허희중 등 청년동지들에게 비밀리에 나누었다.

그 날 정오, 이들은 구포시장에서 장꾼 1,000여명과 더불어「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크게 외쳤다.

시장은 삽시간에 흥분과 비장·감격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이때 김옥겸 외 11명의 주동인물이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군중들의 분노·의분은 참을 길이 없었다.

 격분한 군중들은 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유리창을 파괴하고

 또 투석으로 대항하면서, 어떤 청년들은 주재소 안으로 뛰어 들어가

구금된 애국청년들을 구출하려고 했다.

이 항쟁에서 일군·경 3명(경찰 1명, 헌병 2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애국 군중들 중 9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구포시장의 의거에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주동인물은 다음과 같이 42명에 달하였다.

 이들 주동 인물들은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고,

 또 사회적 신분으로는 농민·상인·노동자들이었다.

부산·동래읍에서 일어난 의거의 주동은 주로 학생 신분이었고

 또 그들의 대부분이 시위운동으로 그친데 비하여, 구포시장의 의거는

 저항의 위력을 발휘한 그 주동이 농민·상인·근로자였다는 것이

민족의 항일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선열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광복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부산광역시 '북구청지명위원회'에서는

 1995년 9월 28일 전체회의를 열어 구포역 앞(구포제1파출소)~구포시장통~대리천

복개도로까지 전장 800m, 폭 8m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하였다.

구포만세 거리의 조성으로 당시 활화산 럼 타오르던 민족항일정신을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구포 3.1의거의 참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부산광역시 북구청에서는 구포장터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 4월 '구포장터 3.1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기념비는 인당 이호철씨가 서체를 쓰고,

기념비는 관음석재예술원에서 제작하여 북구 구포동의 구포교 입구

 낙동강 제방에 가로 315㎝, 세로 345㎝, 높이 545㎝의 거북좌대 위에 자연석 기념비를 세웠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유관기관장 및 유공자 유족,

일반시민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기념비에는 당시 유공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부산광역시)

 

 

 

 

구포역으로 이런 만세길이 만들어진줄 몰랐

우연히 낙동강 걷기를 하고 구포시장으로 가는데

이렇게 역사와 함께한 길이라는걸 알았고 다시한번 걸어보고 싶어졌다

가끔씩 구포시장은 가지만 그쪽 방향이 아니라서 ~~

걷고 보고

또 가리라~~ 구포역 만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