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
서산대사(1519-1604)는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승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게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게 대둔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자연은 이렇게 좋은것만 주는데 우린 뭘 줄까??
글씨가 안보이지요
ㅎㅎㅎ
서산대사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게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게 대둔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를 붙인
「선가귀감」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 「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
「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 「운사단」, 시문을 모아 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사실 대둔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그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 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 때 구국의 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산대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서산 대사는 임란에 승병을 일으킨 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불교 사상적인 면으로 볼 때는 한국의 선풍을 진작시킨 분이며 휴정은 스님의 법명이다.
난세에 태어나 한평생을 선(禪)과 호국의 이념으로 살다간 그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찬연한 하나의 빛이었다.
그는 또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단일한 불교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 <감선가귀감>에는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극렬하게 대립의 길을 치닫고 있던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불교본연의 통일을 모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휴정은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각자의 우월을 주장하던
당시의 모순에서 벗어나 선교 일치를 주장하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선가귀감> <선교선> <선교결> <청허당집> 등의 저술에는 이러한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서산 대사의 의발이 대흥사로 옮겨지면서 대흥사는 명실공히 선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대사의 문도들 가운데 13대종사, 13대강사가 배출된 것은 무척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찬연한 학풍을 배불의 그늘 속에서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서산대사의 유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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