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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김영랑[김윤식]생가와 [모란꽃]공원..모란이 피기까지는 떠올리며! (전남 강진)

구염둥이 2018. 5. 3. 10:02

김영랑생가의 모란꽃[목단꽃] 이야기

 

 

 

목단꽃이 보고 싶어서 멀리 강진으로 따라가 본다

어릴적 고향집 앞마당의 목단꽃

그 꽃이 보고 싶어진다

이맘때면......!!

 

그냥 보면 될껄 그때는

그 예쁜 목단꽃을 따고 싶어서

만지고 있으면

할머니가 어찌나 소리를 지르시며 야단을 치시던지

ㅎㅎㅎ 지금 생각하니

우리 할머니도 목단꽃을 좋아하시였나 보다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난 할머니와 모란꽃 [목단꽃]

 

우리가 가던날이 그곳

 

중요문화제 제 252호 지정된 김영랑생가

 

우리가 가는날이 15회 시 문학제가 열리고 있는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분비는 날이였다

 

 

모란꽃 꽃말은 ..부귀, 영화, 왕자의 품격, 행복한 결혼이라고 한다

 

 

 

김영랑의 생애
13세에 첫 결혼, 23세에 두번째 결혼
당대 최고의 발레리아 최승희와 사랑에 빠짐


 고향서 친구들과 중등학교(금릉중학교) 설립
1950. 9. 29(47세). 6.25 전쟁 중 포탄 맞아 숨지다.[옮겨온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다음팁]

 

 

 

 

 

 

 

 

 

 

 

 

김영랑 시 문학관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모란을 꽃 중의 제일이라고 하여

 꽃의 왕 또는 꽃의 신으로, 또 부귀를 뜻하는 식물로서 부귀화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의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중국 당나라 왕이 모란 그림 1폭과 모란 씨 3되를 보내왔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모란꽃에서 대단한 향기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선덕여왕만은
그림에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모란 씨를 심어 꽃을 피워보니 향기가 나지 않아 모두
선덕여왕의 뛰어난 관찰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과는 달리 일반적인 모란은 향기가 있다[다음백과]

 

 

 

 

제15회 영랑 백일장이 열리고 있는 김영랑생가 마당

앞으로 많은 시인이 나올것 같다

넘 좋은 이야기

그래서 사진을 찍을수가 없다

방해가 될까보 얼릉 공원으로 조용히 간다

옹기종기 이곳 저곳 많은 학생들과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시를 스고 있었기에..

 

 

 

 

 

생가뒷쪽으로 가본다

 

 

 

 

 

 

모란공원으로 이여지는 계단이다

 

 

 

 

 

 

 

 

 

 

 

 

 

 

 

 

모란공원이다

 

 

 

 

 

 

 

 

 

 

 

모란원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은 모란원이다

여러종류의 모란꽃들과 봄꽃을 예쁘게 피여있는곳

 

 

 

 

 

 

 

 

 

 

 

 

 

 

 

 

 

 

 

 

 

 

 

 

 

 

 

 

 

 

 

 

 

 

 

 

천사의종꽃

 

 

 

 

 

 

 

 

 

 

 

 

모란공원이다

모란 공원에 올라가보면 강진의 앞 바다가 눈에 보인다

볼거리 많지만 우린 시간에 쫒겨 바쁘게 돌아다니니

 제대로 못보는게 더 많다

그래서 늘 아쉽지만 그나마 이렇게 안다니면

못 가고 못 본다는 이야기

 

 

 

 

 

 

 

우리사랑이랑 모란공원에서

 

 

 

 

 

 

 

 

 

 

 

 

 

 

 

 

 

 

 

 

 

축제 분위기를 살려주는 젊은이들의 콕서트...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다음팁]

 

 

 

#강진 #깅영랑 생가 #모란이 피기까지 #모란꽃 #모란공원 #모란꽃 꽃말